오늘의 주제 힌트.
말 많고 탈 많은 논쟁적 분야.?!
베일에 싸인 고대의 흔적을 찾아서 발로 뛰는 고고학자&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권오영 교수.
백제토기 250여점
두번째 사진도 토기임.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한 봉수형 유리병 국보 제 193호임.
경주 로만글라스의 출처를 찾아서
놀랍게도 신라와 비슷한 로만글라스 발견. 22개 러시아연방중 한곳인 투바공화국.
기원전 8~7세기 초 스키타이 왕족들의 무덤인 아르잔 쿠르간 유적에서. 그곳 무덤에서 발굴한 인골이에요.
옆에 누으신분은 키가 170cm 사진작가분임.
척추 뼈의 주인은 순장 당한것으로 추정된다고함.
5년, 10년 지났는데 모두 부식되거나 그러는데 1971년 중국에서 발견된 한 무덤에서는 무려 2100년간 섞지 않은 여인의 미라를 발견.
온도, 습도등 최적의 보존환경이 있으면 가능하다고해요.
현존하는 미라 중 가장 완벽한 보존상태. 뼈야말로 1등급 사료라고함.
뼈가 말하는 역사는 신장, 성별, 사망원인, 질병, 영양상태, 가족구성까지 알수 있어요.
땅속에서 역사를 찾는 고고학자.
우리나라 유적에서 나온 유물 중에
육지, 해상 실크로드 통한 교류의 증거들. 진위여부를 확인하러 외국에 간다고함.
고대한국 문화 교류의 기원을 찾는 작업.
가장끔찍했던 경험이 발굴 작업중 암매장된 의문의 시신을 발견한 적도 있다고함. 시신 수습은 법적 절차를 밟아
법의학자들과 협업하여 진행한다고함. 철저한 고증을 거쳐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무덤 발굴 작업임.
발굴 장소를 선별하는 기준은? 무차별적 발굴은 도굴이에요.
최근 5년간 매년 1800~2400건 발굴조사를 진행하는데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류에 의거해 엄격한 사전허가를 받아 발굴을 진행
고대사 문헌 연구는 거의 끝난 상황이라고함. 매년 수만, 수십만 점의 유물이 출토.
한국 고대사 연구를 이끄는 고고학적 발견. 문헌 자료가 부족해 베일에 싸여있던 한국 고대사.
유적 발굴을 통한 복원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중임.
가장 덜 알려진 고대국가인 백제. 백제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그렇다면 백제의 왕은 몇명이었을까요?
31명이에요.
삼국시대 중 백제가 덜 알려진 이유는? 고구려보다 일찍 멸망한 백제. 이후 삼국을 통일한 신라.
멸망 과정에서 약탈과 도굴에 노출됨. 역사에서 지워진 패자의 비극.
그런데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재발견된 백제. 그결과.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주 공산성(사적 제12호)
웅진 백제시대 수도 방어를 위해 축조된 성곽.
공주 송산리 고분군 사적 제 13호
웅진 백제시대 왕족들의 무덤.
부여관북리유적 사적 제 428호 부소산성 사적 제 5호
사비백제시대 궁궐터와 성곽. 부여 정림사지 사적 제 301호
부여나성 사적 제 58호.
부여 능산리 고분군 사적 제 14호 사비백제시대의 무덤군.
익산 왕궁리 유적 사적 제 408호
익산 미륵사지 사적 제 150호
숨겨진 백제의 진짜 모습 지금부터 만나볼까요?
고대 국가 백제의 특징은 1. 소통, 2. 개방성, 3, 국제화.
가장 백제다웠던 6세기.
동아시아를 넘어 동남아시아를 잇는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인 백제.
고대 무역 강국 백제, 베일을 벗다.
서울 한성백제 시기가 압도적.
지금도 서울은 발굴조사중이라고해요.
잠실인데 한성 백제 왕릉임.
석촌동 고분군은 돌로 만들어진 왕실 묘역임.
1970년대까지 200기가 넘는 돌무덤이 존재.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석촌동이에요.
하지만 전쟁, 도시개발로 상당수가 파괴됨. 현재까지 정비된 고분은 8기.
고구려 대표 왕릉이 장군총이잖아요.
무덤의 주인은 누군지 모릅니다.
도시개발로 상당 부분 파괴된 고분. 연대를 알수 있는 중요한 유물을 발견.
중국제 청자반구병. 4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고함.
고구려와 어깨를 견주는 4세기 백제왕. 근초고왕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해요.
근초고왕 371년은 백제 VS 고구려, 세기의 전투가 발발하죠.
화살에 맞아죽은 고구려의 고국원왕.
이후 복수를 다짐한 고구려.
계속되는 치열한 전투. 고구려의 형세 역전으로 근초고왕을 죽이고 한강 유역까지 밀리게됨
당시 백제는 21대 개로왕 시대
475년 고구려에게 포외당한 백제 왕성.
몽촌토성으로 피신 중에 붙잡힌 개로왕.
그곳에서 무참히 참수당한 개로왕. 개로왕 475년 한성백제의 멸망.
첫번째 수도 함락후 공주로 천도한 백제.
한성 백제 멸망을 뒤로하고 새롭게 백제 중흥기를 연 세명의 왕.
먼저 무령왕을 통해 본 백제.
개로왕 사후 세력이 약해진 백제. 우여곡절 끝에 웅진 백제 시대를 연 22대 문주왕.
이를 견제한 공주의 귀족 세력.
23대 삼근왕 재위 2년만에 사망 24대 동성왕 재위 22년 암살.26년간 왕족들의 피로 얼룩진 웅진 백제.
심지어 계속되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더욱 살기 힘들어진 백성.
혼란이 극에 달한 격동의 백제. 이때 왕으로 등극한 무령왕.
가야, 고구려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빠르게 국력을 회복함. 백성들도 정성으로 보살피고
반란을 일으킨 지방 세력을 정리함.
무령왕, 무령왕릉에서 깨어나다.
웅진 백제 시대 왕족들의 무덤, 공주 송산리 고분군.
1971년 7월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 진행중 삽날에 걸린 무언가?1
흙을 파 내려가기 시작하자 모습을 드러낸 무령왕릉 입구.
전혀 도굴당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됨.
약 1500년이상 밀폐된 무덤으로 온도가 급격히 바뀌면서 습기가 대방출.
무덤 발굴 전날 꿈을 꿨는데 신비한 동물이 품으로 들어왔다고함.
입구봉쇄한 벽돌을 꺼내니 하얀 기운이 훅 나왔다고함.
역사적인 순간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게다가 구경나온 주민들로 인산인해였음. 급기야 잘못된 선택에 이른 발굴단.
불과 11시간 만에 끝냄.
1971년 당시 발굴 현장을 취재한 영상임.
1500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지금이라면 절대 불가한 상황이죠. 정확한 위치도 잘 모르고 가끔 사극에 보면
같은 모자지만 다른방향을 하고 있잖아요.
유물 배치만 잘 기록했어도..
아무런 준비없이 마주한 무령왕릉 발굴 작업.
한번 움직인 유물은 돌이킬수 없죠. 다시는 반복돼선 안될 한국 고고학계의 뼈아픈 실수.
금판을 오려 구슬을 금실로 달아 장식.
금 철사를 꼬아 나뭇잎을 장식.
제비의 우아한 날갯짓이 느껴지는
금판으로 거북 무늬를 만들고 금꽃으로 장식.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행운의 왕릉.
금동제 신발.
동탁은잔.
백제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세기의 발견.
무령왕릉에서 발굴한 유물의 수는?? 지금도 세고있다는 슬픈 전설이...! 발굴한지 50년이 지났는데..
미흡했던 발굴조사의 여파. 현장에서 쓸어 담은 흙 속에서
무령왕릉, 어떻게 도굴을 피했나?
도굴 위기만해도 여러번이었음. 가장 큰 위기는 일제강점기죠. 고분을 무자비하게 훼손한 일본인들.
1910~30년까지 일본인들의 마구잡이식 도굴이 횡행.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도굴꾼.
엄청나게 파고 다님. 일본 총독부에서 경고할 정도라고함.
무려 20년간 공주 곳곳을 다니며 도굴을 자행한 가루베 지온.
그러던 어느날 송산리 6호분 배수구 발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1년간 땅을 판후 도굴.
1933년 8월 도굴후 조선총독부가 촬영한 내부 모습임.
왕릉으로 생각함.
무령왕릉은 원래 봉토가 깎여나갔어요. 가루베지온 이전에
백제 멸망후 중국 당나라군의 눈을 피한 무령왕릉.
이집트왕 투탕가멘의 무덤처럼. 63개의 파라오 무덤 중 유일하게 도굴을 피한 무덤임.
미숙했던 발굴이 아쉬울 따름이라고함.
무령왕릉의 정체, 어떻게 밝혀졌을까요? 이것도 기적이라고함.
경주 황남대총, 두 무덤 모두 신라시대 왕릉이에요.
시기는 아는데 어떤 왕인지 몰라요. 글자를 안 써놨어요.
무렬왕릉이 역사적으로 가장 유의미한 발견. 이름, 사망일등 왕의 신상을 기록하고 있음.
입구를 개봉하는 순간 저 동물이 똭!
무령왕릉 석수로 악귀를 좇고 무덤 수호를 위해 기괴한 동물로 표현함.
무령왕의 지석.
사마= 무령왕의 본명임.
고대 삼국시대 무덤중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무령왕릉.
죽은뒤 약 27개월 후 무덤에 안장함.
백제 삼년상의 증거. 조선시대 삼년상은 3년동안 부모님 묘소에 거처하는 유교식 삼년상이에요.
백제의 삼년상은 다름.
그런데 시신을 땅에 묻지 않으면? 부패하죠.
어떻게 3년동안 시신을 보관했을까? 미라, 화장등 세계 보편의 장례풍습 총망라해봤는데
하나 빠진게 물에 띄워보내는 수장. 풀리지 않던 백제 삼년사으이 미스터리.
위대한 발견은 우연한 기회에 오죠. 그것도 땅에서
백제 삼년상 비밀의 열쇠. 무령왕릉 발굴후 25년후 드러난 유적.
1996년 공주 정지산 꼭대기에서 발견된 의문의 흔적들.
정지산의 비밀은 수수께끼의 단서가 무령왕비의 지석에 있음.
추정컨대 정지산 유적에 시신을 보관 후 약 27개월 후 무덤에 안치한 것.
그렇다면 시신 부패는 어떻게 막았을까? 차갑게.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인 석빙고가 있었으니까 빙고가 있었어요.백제에도.
겨울에 금강의 얼음을 깨서 산으로 운반을 하고 관 주변에 얼음을 넣어 부패를 방지함.
그렇게 약 27개월 동안 왕과 왕비의 시신을 모셔둔 곳.
문헌 기록이 거의 없는 무령왕.
왕릉, 정지산 유적등 현장에서 땀 흘려 얻어낸 쾌거임.
백제 문화의 보물창고, 무령왕릉.
무덤을 지키는 석수를 지나면~
벽돌로 만들어진 내부가 나와요.
마치 예술작품을 보는 듯.
동시대 신라와 고구려에서는 볼수 없던 벽돌무덤 양식임.
등잔이 들어가게 구멍을 파 놓음.
벽돌무덤은 백제 고유의 양식일까요?
한성백제의 무덤양식은 돌무지 무덤임.
돌을 쌓아 만드는 한성백제 시대 무덤양식임.
굴식 돌방무덤은 돌로 방을 만들어 흙은 씌우는 웅진백제 시대 무덤 양식임.
무령왕릉은 기존과 차별화된 벽돌무덤 양식임.
가루베지온이 도굴한 송산리 6분도 백제시대 대표적인 벽돌무덤.
벽돌무덤은 백제 고유의 양식이 아니에요.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지배층의 무덤양식임.
바로 기술력!
현대식은 접착제 없이 고도의 기술로 아치형을 완성하죠. 벽돌이나 무덤 만드는 기술은 중국 양나라 기술자에게 벽돌 제작법을 전수받은 백제. 이후 벽돌 자체 생산까지 성공함. 그렇게 백제식으로 재탄생한 무령왕릉.
이걸 만든 인물이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
중국 무덤 양식을 수용한 백제. 이동 수단 발달전엔 보통은 시차를 두고 전파되는데
어제의 중국기술이 오늘 백제에 선진문화 수용후 다른나라에 전파한 백제.
수용은 하되 백제식으로 변용. 대표적으로 석수는 백제 역사속으로~
핵심은 개방성. 당시 중국 양나라는 6세기 국제 외교의 장이었어요.
양나라 전성기를 연 인물이 있었으니..
외교의 장이었던 양나라의 수도 남경.
무령왕 시대 그곳에 파견된 백제 사신. 그증거가 양직공도에 나와요.
백제국의 사신은 머리에 관을 스고 두르마기 바지, 가죽 구두를 신은 모습.
빨간입술에 단정한 눈매, 수염없는 피부.
양무제의 아들 소역은 천재 화가로 주변국 사신을 직접 보고 그리거나 소식을 종합해서 그렸는데
덕분에 백제인의 얼굴과 중국과의 교류를 확인.
실물은 소실되어 양직공도 4가지 모사본이 존재한다고해요. 이버전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인 모두 존재함.
521년 백제 사신의 도움으로 양나라에 방문한 신라 사신.
국제무대에서 외국 사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함.
선진문화를 통해 안목을 높인 백제.
이것이 선진문물 교역의 증거에요.
기본적으로 중국 무덤 양식을 수용했지만 화려하고 세련된 백제의 공예품.
일본산 나무로 만든 유물부터 인도, 동남아시아산 유물까지있음. 그야말로 국제적이죠.
발견당시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지만 1500여년 동안 썩지 않은 목관.
분석결과 한반도에서는 자라지 않는 일본산 금송임.
일본에서도 지배계층의 관재로만 사용. 목질이 단단하고 습기에 강한 최고급 관재에 화려한 장식을 수놓아 정성스럽게 왕과 왕비를 기린
무령왕릉에서 가장 많이 발굴한 유물은?
아직도 세고 있다는 슬픈 진실...ㅠ
애도의 의미로 왕의 무덤에 뿌린 유리구슬.
유리구슬의 출처는? 처음에는 백제 것으로 생각했는데 유리구슬도 수입품임.
유리구슬 발견 지역이 아프리카, 인도, 태평양 일대에요.
인도,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발견된 공방. 나라마다 재료도 제각각이에요.
유리구슬 출처를 찾으로 베트남으로 감. 백제 유적지에서 쏟아진 유리구슬의 뿌리를 찾아 떠난
분석 결과 백제 것과 일치함.
유리구슬의 정체는? 1. 우호국에 대한 성의 표시.
2 . 중간 무역상으로 활약.
한, 중, 일을 넘어 동남아시아를 잇는 문화교류 결실의 산물. 무령왕릉.
무령왕릉을 통해 확인한 백제의 국제성.
타문화 수용의 흔적은 이해. 백제가 문화를 전파했다는 기록은? 백제는 원천기술보다는..!
선진문화를 수용해서 백제식 보급판으로 변용.
특히 일본 고대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친 백제.
4세기 근초고왕 시절
무령왕 시절 일본보다 앞섰던 백제문화. 일본은 차려 입는 자리엔 백제 예복을 픽했다고함.
아키히토 상왕은 내안에는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함.
8세기 일본 나라시대 간무왕의 어머니
8세기 일본은 일부다처제로
왕이 되기전 지방 수장이었던 계체. 왕이되는데에는 백제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을 것.
그 증거가 바로 인물화상경이에요.
한- 일 고고학계 해석이 분분해요.
무령왕과 계체왕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파한 백제. 백제에 군사, 외교적 지지를 보낸 일본.
6세기 유례없는 우호적 관계를 맺은 무령왕과 계체시대.
백제 무령왕은 유례없는 우호 관계의 상징이죠.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무령왕.
왕위를 물려받은 아들 성왕.
아소카왕을 아시나요?
불교를 전 세계에 퍼트린 아소카왕의 다른 이름은 전륜성왕이에요.
고구려, 백제, 가야, 왜 이웃국의 존경을 받은 성왕.
백제의 중흥을 꿈꾸며 최고의 신도시를 건설한 성왕.
해상무역의 중심이 되기 위해 국제무역항 구드래항을 건설.
바닷길을 통해 동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간 백제.
백제, 가야, 일본은 동맹 체제 확립을 위해 538년 일본을 시작으로 불교문화를 전파.
백제의 대내외적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불교를 외교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성왕.
사비백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
정확한 성왕의 무덤은 확인 불가.
도굴당했습니다...ㅠㅠ
사비 백제를 건설한 성왕. 가장 좋은곳에 묻히는게 인지상정이죠.
두번째 이유는 왕릉의 형태. 사비백제 시대무덤으로 이전의 아치형 벽돌무덤을 탈피함.
그런데 2호분만 무령왕릉 무덤과 비슷함.
아버지 성왕의 아들들은 주변에 안장.
성왕의 아들 위덕왕의 묘로 추정되는.
1910년대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위덕왕의 묘.
하지만 도굴꾼에 의해 사라진 귀중한 유물들.
당시 주차장이 없었던 능산리 고분군. 관계자들이 유물이 없어 보이는 곳에 주차장을 만들자고함.
그렇게 시작된 공사. 우연하게도 국보중의 국보중의 국보. 역대 최고의 걸작이 발견됨.
660년 당나라군에 의해 빼앗길까봐누군가 목숨을 바쳐 파묻은 국보.
주차장 공사중 우연히 발견.
국보 제 287호 백제 금동대향로에요. 백제의 예술혼을 집대성한 작품.
받침은 생명의 근원인 바다를 상징하는 용임. 용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연꽃.
뚜껑은 백제인들이 상상했던 신선의 산악세계.
백제인의 사상과 이상향이 담긴 백제 금동대향로.
신선들이 사는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표현한 것.
바위에 앉아 명상에 잠긴 사람.
계곡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
말을 타고 힘차게 달려가는 사람.
호랑이, 원숭이, 등등. 코끼리는 인도와 무역을 했었다는 증거죠.
엄청 다양하게 있었네용...ㅠㅠ 왜 학교다닐땐 이렇게 자세히 안알려주셨나요?
완벽한 조형 기술.
주조는 녹인 쇠붙이를 틀에부어 만드는 방식임. 틀을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대학원 한학기 주제라고해요.
그만큼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높이 64cm 지름 20cm 무게 12kg 임.
향을 피우는 화로인 향로임. 하지만 백제 금동대향로에는 슬픈 사연이 있어요.
땅에서 건져 올린 백제의 숨은 이야기. 발굴 당시 정체를 알수 없던 백제 금동대향로.
용도와 만든 사람을 몰랐던...! 땅에서 나온 자료가 우리 역사를 풀어줍니다.
2년뒤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또 다른 유물.
이것역시 국보중의 국보임.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둔 곳임.
위덕왕의 생전 이름은 창이에요.
매형공주는 창왕(위덕왕)의 누이임. 567년 성왕이 죽은지 13년후.
사비백제를 건설한 성왕의 큰 그림.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자!
그 힘든일을 성왕때 해냅니다. 전략적 파트너 신라와 함께. 당시 신라의 왕은 진흥왕임.
신라는 중상류일대 백제는 하류 일대를 사이좋게 차지함.
백제를 급습한 신라. 120년 나제동맹을 파기함.
곧이어 긴급회의를 소집한 백제 조정.
젊은 패기로 전쟁을 밀어붙인 창. 결국 신라와의 전쟁을 선포함.
하지만 성과없이 길어진 전쟁으로 전장의 아들을 돕기 위해 겨우 군사 50명을 이끌고 간 성왕.
그길목에 이미 매복해있던 신라군. 장군의 정체는 김유신 할아버지. 이름도 어마무시한 김무력.
일부러 지위가 낮은자에게 성왕의 목을 베도록 지시함. 결국 목이 베인 성왕.
성왕의 목은 신라군의 전리품으로~ 신라경주 관청 계단 아래에 묻힌. 성왕의 몸만 백제로 돌려보낸 신라.
겨우 목숨만은 건진 창. 죄책감에 왕위까지 포기하려고 했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제를 안정시키고 이후 아버지를 기리기위한 사찰, 능사를 건설.
그렇게 태어난 국보중의 국보. 백제 금동대향로.
창왕과 누이가 죽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백제 금동대향로를 만들어 향을 피우고
아버지를 극락정토로 모시기 위해 탑을 만들어 부처의 사리를 바친 것. 땅에서 발굴한 유물이 밝혀낸 성왕과 위덕왕 백제의 숨겨진 역사.
위덕왕의 슬픈 역사가 10년뒤에 또다시 나타남.
땅에서 발견한 희한한 유물 한점.
석제 속 흙탕물을 걷어내자
청동으로 만든 용기의 정체는?
흡사 러시아 마트료시카 같은!!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한 백제 황동사리병이자 현존하는 국내 사리기 중 가장 오래된 사리 공예품임.
567년 성왕을 위한 절을 짓고 577년 정확히 10년 뒤 또한번의 큰 슬픔을 겪은 창왕.
이번엔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도다른 사찰, 왕흥사를 짓고 탑을 세운 창왕.
여기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어요.
불심으로보면 사리 세개가 보인다고!!ㅋㅋㅋ 믿지 않으면 그냥 물임.
성분분석 결과 진짜 그냥 물이었음.
수준높은 백제의 문화를 알수 있는. 사리기와 함께 발굴된 백제의 사리 공양품들.
능사, 왕흥사, 대규모 사찰과 사리 공양을 통해 백제 불교문화의 전성기를 꽃피운 위덕왕.
무령왕 성왕은 우호 관계를 맺어온 중국 남조의 쇠락.
국제 정세의 변화에 신속하게 반응함. 특히 일본에 적극적으로 불교문화를 전파함.
그결과 바로 백제인이 지은 일본 최초의 절 아스카데라.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흡사한 호류지 오층탑.
그동안 삼천궁녀와 의자왕 패자의 역사로 기억한 백제.
하지만 베일에 감춰져 있던 진가. 동북아시아의 중심 무역 강국! 무령왕, 성왕, 위덕왕이 꽃피운 백제의 진면목.
우연히 땅에서 발견된 자료들이 밝혀준 진실. 그래서 더욱 귀중한 국보 중의 국보가 아닐지.
코로나19로 움츠러든 국가 간 교류.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은 아닐 것.
자국도 중요하지만 국가 간의 활발한 교류로 함께 발전했던 6세기 문화 강국 백제의 역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그려보는건 어떨지~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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