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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파원 25시, 윤동주의 흔적을 찾아서.

by 로토루아8 20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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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9주년을 맞이한 광복절,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이었던 윤동주.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서..!

 

광복절을 기념해 만나볼 특별한 인물, 

 

 

일제강점기 저항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흔적을 찾아 처음으로 가볼 곳은?

윤동주 시인은 1941년 연세대학교의 전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합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윤동주.

일본 유학길에 올라 처음으로 공부했던 장소, 릿쿄대학입니다. 

 

 

1874년 설립된 도쿄의 대학으로 미국 성공회에서 파견된 선교사인 윌리엄스 주교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현재는 일본의 명문대 중 하나로 릿쿄대학 재학 당시 강제 단발령으로 머리를 깎아야 했던 윤동주.

윤동주를 떠올리면 짧은 머리가 연상되는 이유죠.

 

전시 체제라는 이유로 무기, 제식훈련을 받아야 했던 대학생들. 당시 학생들 사이에 퍼진 소문이 있습니다. 

 

 

군국주의 사상이 지배적일 때 교련 거부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릿쿄대학에는 윤동주의 어떤 흔적이 남아 있을지?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

 

 

재학 당시 집필한 5편의 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쉽게 쓰여진 시입니다.

덕분에 소실되지 않고 전해진 시들. 연희전문학교 시절 만난 학우가 있습니다.

 

 

핀슨홀 삼인방입니다. 핀슨홀 삼인방의 핀슨홀은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의 이름입니다. 릿쿄대학 내부로 이동합니다. 

 

 

 

실제 윤동주가 공부한 강의실이 1104호입니다. 

릿쿄대학 시절 썼던 시 중 가장 유명한 쉽게 쓰여진 시.

 

 

작품의 배경으로 추정되는 1104호. 

일본 동앙철학계의거목인 우노 데쓰토 교수의 동양철학사 수업. 유학생 윤동주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던 강의실.

릿쿄대학에서 윤동주의 서거일마다 열리는 행사가 있다고 합니다. 릿쿄대학 동문이 중심이 되어 만든 시인 윤동주 추모회

 

 

 

2008년 처음 시작된 추모회로 매년 300여 명이 참석하고 있다고 해요.

시 낭독과 추모 예배로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행사입니다. 일본인도 다수 참석해 그를 기억하는 뜻깊은 추모회.

릿쿄대학에서 1942년 4월부터 한 학기만 이수. 

 

그다음 윤동주 시인이 향한 곳은 어디일지?

릿쿄대학을 자퇴한 후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편입을 합니다. 

 

 

윤동주의 동갑내기 친구이나 고종사촌인 

 

 

독립운동가 송몽규가 도시샤대학 근처 교토제국대학에 재학중이었습니다.

같은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평생의 동반자. 도시샤대학 편입 후에도 가까운 벗으로 지낸 두 사람.

 

 

윤동주 시인의 시비는 한글로 새겨져 있어요. 윤동주 사망 50주기를 기념. 

1995년 2월 16일 한국인 동문들이 세운 시비로 적혀져 있는 시는 대표작 서시입니다. 

 

 

일본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1년에 쓰인 서시.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기념해 시집을 출판하고자 했던 윤동주. 그 시집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총 3부를 제작한 시집으로 3부를 스승 이양하, 후배 정병욱 이렇게 나눠서 보관했습니다. 그 중 2부는 소실되었고 후배 정병욱이 강제 징집을 가면서도 어머니에게 이 시집만은 꼭 지켜주십시오. 

 

 

덕분에 세상 밖으로 나온 윤동주의 첫 시집.

일본에서도 윤동주 시인을 기리고 일본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마음.

 

 

일본인 추모객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는 시비. 도시샤대학에서 만나본 윤동주 시인의 흔적.

 

 

 

마지막 장소는 도시샤대학에서 가까운 교토 조형예술대학 분교의 근처.

1942년 도시샤대학에 편입 후 1943년 7월 체포될 때까지, 약 9개월간 하숙을 했던 동네입니다. 

윤동주가 머물던 하숙집은 현재 어떤 모습일지?

 

 

윤동주의 하숙집이었던 곳이 대학교 건물로 바뀌었고, 옆에는 윤동주 유혼지비가 있습니다. 

시비에 적힌 윤동주의 서시.

 

 

윤동주가 연행되었떤 장소도 하숙집.

윤동주가 경찰에 연행된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던, 시모가모 경찰서입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징집을 피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했고,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에서 체포되었죠.

윤동주 시인이 끝내 체포된 이유는 송몽규와 함께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 독립을 선동했다는 죄목입니다. 송몽규의 경우 군관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쳤기에 일본 경찰이 예의주시하던 인물이었죠. 송몽규와 가까운 것 만으로도 윤동주는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던 거죠.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로 시를 쓴 죄, 조선문화의 유지 향상에 힘쓴 죄, 징역 2년을 선고받습니다.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된 뒤, 불과 해방을 6개월 앞둔 시기,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윤동주.

수감 후 1년 7개월 만에 사망, 윤동주의 가족에게도 전해진 비극적인 소식.

 

후쿠오카 형무소로 달려간 윤동주의 아버지.

알려진 사인은 뇌일혈, 조선인에게 알 수 없는 약물 주사를 넣었고 그당시 형무소에서 20분 떨어진 곳에서 미군 포로들의 정맥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실험을 진행했다고 해요.

 

주사를 맞은 후 암산 테스트를 해야 했던 수감자들, 바닷물을 혈액에 주입했다는 생체 실험설이 나왔지만,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망원인, 함께 수감된 송몽규 역시 광복을 보지 못하고 한 달뒤 사망합니다. 

 

 

시대의 아픔을 시로 표현한 민족 저항 시인 윤동주.

도쿄와 교토에서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 시간.

별빛 같은 삶을 살았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윤동주.  외국에서 만나니 더욱 감회가 새로운 우리 역사.

 

출처: 톡파원 2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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