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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역사학자 권용철의 드라마로 본 고려거란전쟁,거란,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의 서막.

by 로토루아8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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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부족에서 한 나라로 성장한 거란, 영토 확장을 위해 가장 먼거 저란이 노린 곳은?

 

 

중원을 향해 남쪽으로 진출을 시도한 거란, 당시 중원의 상황은 907년 당나라 멸망 후 나타났더 없어졌다를 반복하던 여러나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입니다. 

 

 

 

바로 5대 10국의 시대로 907년부터 979년까지 항하 유역을 중심으로 5개의 왕조와 여러 지방정권의 흥망이 거듭된 정치적 격번기입니다. 혼란한 정셀르 틈타 중원 정복을 위해 여러 번 전투를 벌였떤 야율아보기. 그런데 중원을 정복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죠.

영토확장을 포기할 수 없으니 거란이 새로운 정복지로 결정한 곳은?

 

 

발해였던거죠.  발해는 698년부터 926년까지 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조영이 건국했는데, 해동성국이라고 불리며 동북아 최강대국으로 성장했죠. 넓은 영토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

강한전투력과 잔혹함으로 무장한 거란군은 전쟁 시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발해의 수도를 포위합니다. 926년 228년의 역사를 가진 발해는 멸망하게 됩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아시아 최강대국이 된 거란.

 

거란에 닥친 충격적인 사건은?

926년 전쟁 후 귀국하던 야율아보기가 55세의 나이로 돌연 병사하게 됩니다. 

 

 

황제의 시신을 모시는 방법은 미라로 만들기입니다. 

 

 

제포는 거란만의 독특한 장례 풍습으로 황제의 시신을 말린다는 의미입니다. 저승에서 재생하기 위해 온전한 육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미라를 금속망으로 감싸게 됩니다. 시신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함이죠.

 

 

흡사 이집트 미라와 비슷한 방식인데, 과학적인 거란의 미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미라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약 1000년이 된 불상 안에서 미라가 발견됩니다. 

 

 

네덜란드 드렌츠 박물관에 보관된 승려 미라 불상의 모습인데요.

장기가 적출된 채 수행 자세로 앉아있는 미라를 발견했죠. 수행 자세의 상태로 미라를 만든 후 불상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요.

 

거란의 초대 황제인 야율아보기의 갑작스러운 죽음.

중원의 혼란을 틈타 영토 확장에 힘쓴 거란. 

 

 

역사를 바꾼 땅을 얻는데 성공한 거란.

936년 후당이 멸망하고 후진을 건국하게 됩니다. 이때 후진의 건국을 도와준 나라가 바로 거란입니다. 

 

 

거란의 도움이 너무 고마웠던 후진의 황제는 만리장성 이남인 연운 16주 지방을 거란에 할양합니다. 

만리장성 남쪽의 당을 차지한 북방 민족은 역사상 거란이 최초가 된 상황입니다. 

풍요로운 농경지인 연운 16주, 안정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또 한 차례 성장한 거란.

960년 거란의 거침없는 행보에 제동을 건 새로운 왕조가 등장합니다. 

 

 

5대 10국시대로 분열된 여러 국가를 차례로 정복하면서 중원을 통일한 송나라입니다. 

960년부터  1279년까지 조광윤이 건국한 왕조로 차츰 세력을 확대하면서 결국 분열되었던 5대 10국을 통일합니다. 

 

 

당시 송나라의 수도 변경이 거란과 가까웠기 때문에 거란이 거슬리게 됩니다. 송나라 입장에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죠.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선포한 송나라. 그렇게 10년 이상 전쟁을 벌인 두 나라. 거란이 송나라에 대한 전략을 수정한 계기는? 거란의 새로운 황제가 등극합니다. 

 

 

거란의 최고 전성기인 6대 황제 야율 융성.

야율 융서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문학에도 해박했지만 12살에 황제에 등극했고 어머니 승천황태후가 섭정을 합니다. 야율융서에게는 넘어야 할 큰 산이었던 어머니, 

 

 

거란의 여걸인 승천황태후는 말타기, 활쏘기는 물론이고 직접 전쟁에 출정하기까지 합니다. 어린황제+ 여성이 섭정을 하니 이를 무사했던 송나라, 승리를 거머쥘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거죠. 그리고 이런 전운을 감지한 거란이 주목한 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고려죠.

 

 

 

당시 거란과 고려의 관계는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같은 민족인 발해를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했던 고려, 거란은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는데 942년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게 시신 30명과 낙타 50마리를 선물합니다. 낙타는 말보다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어요.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던 거란의 노력, 선물받은 낙타 50마리를 왕건은 어떻게 했을까?

 

 

개경에 있던 만부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다리 아래에 50마리의 낙타를 매어두고 방치하게 됩니다. 이를 만부교사건이라고 하죠. 942년 고려 태조 때 우호 관계를 위해 거란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만부교 아래에 굶겨 죽인 사건입니다. 

942년 만부교 사건 이후 982년 야율융서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약 40년간 단절되어 있던 고려와 거란. 

 

거란에 대해 유언을 남긴 왕건, 만부교 사건이 끝이 아닙니다. 태조 왕건이 후손에게 남긴 유언인 훈요 10조를 보면

 

 

태조 왕건 이후 실제 거란과 교류가 없던 고려.

그런데 송나라와 조공책봉 관계였던 고려.

 

 

송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후방의고려가 신경 쓰인 거란, 우호 관계를 위해 거란은 고려에 사신을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죠.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거란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있습니다.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것. 거란의 명장 소손녕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합니다.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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